[우닝워켄] 당신이 없는 밤
이 글은 예전에 열렸던 언라이트 글합작:한 문장으로 시작하기 합작에 내려고 쓰던 글이었습니다. 한 문장을 뽑아 그것을 시작으로 정해진 내용 없이 자유롭게 쓰는 합작이었지요.
그렇기에 이 글도 그 합작의 주제였던 '당신이 사라진 지 정확히 스무날째 되는 밤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만, 그 합작에 최종적으로 제출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문제시 비공개나 보호글 처리가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사라진 지 정확히 스무날째 되는 밤이다.
“이거, 슬슬 유통기한이 간당간당하잖아?”
복도까지 들어찬 밤공기에 입김을 흘리며 브라우닝은 현관 앞의 신문을 주워들었다. 줍기 전의 신문의 모습은 아침 일찍 집을 나서다가 발로 한 번 걷어차 귀퉁이가 조금 구겨진 것 외에는 신문배달부 청년이 계단을 오르내리며 던져둔 모양새 그대로였다. ‘오늘은 아무도 방문하지 않은 건가.’ 이제는 유효기간이 거의 끝나가는, 활자라는 형태로 눌러 찍힌 하루의 새로운─그리고 곧 구식이 되어버릴─소식을 어떻게 처리할까 하다가 멀리서 들려오는 고양이 울음소리를 듣고는 집 안으로 가져가기로 마음먹었다. 괜히 밖에 내버려두었다가 고양이가 마구 긁고 찢어대어 복도가 엉망이 되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다. 열쇠를 구멍에 밀어 넣고 문고리를 돌리다가 어느새 손목에 감긴 시계가 12시를 가리키는 것을 본 브라우닝은 싸늘하게 소름이 돋는 팔을 양손으로 문지르며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 커피 사두는 걸 잊었군.”
마지막 하나 남은 인스턴트커피는 아침에 마시기로 하고 접대용 티백을 꺼내 뜨거운 물에 담갔다. 그다지 취향은 아닌 재스민 향기가 올라오는 찻잔을 적당히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신문을 펼치면 언제나 비슷비슷한 기사들이 지면을 빼곡히 채우고, 가장 시선이 잘 가는 곳에는 쓸데없이 과시욕만 불러일으키는 물건들의 광고가 크게 박혀 있었다. 페이지를 건성건성 모두 넘기고 나자 힘이 빠져서 그대로 고개를 뒤로 젖혔다.
푸우─ 한숨인지 뭔지 모를 것을 내뱉고 다시 신문을 펼쳤다. 실종자를 찾는 투고란은 대충 넘기는 것만으로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원래 직업도 직업이긴 했지만, 최근에는 매일같이 들여다보고 있었으니까 이제 손에 익은 것이다. 펼쳐 든 페이지를 보자 자그맣게 실린 어린아이와 노인들의 얼굴 사이에 자리하던 익숙한 얼굴이 없었다. 브라우닝은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피곤함에 젖은 눈을 끔벅거리고 봤지만 역시 없었다. 잘못 보거나 지나친 게 아니었다. 문득 신문 맨 위에 적힌 날짜에 눈이 갔다. 아, 그렇군. 기간이 다 된 거군. 브라우닝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그저 돈을 더 입금하지 않았기 때문에, 끊겼을 뿐이다.
「워켄」
워켄이 이 도시에서 사라진 지 스무날째 되는 밤이 지나갔다.
“으하암~”
침대 위에서 몸을 쭉 뻗으며 뒹굴던 브라우닝의 눈에 창문 너머에서 들어오는 바람에 나부끼는 커튼이 보였다. ‘분명 단단히 쳐 두었을 텐데. 감기라도 걸리면 곤란하니까 말이야.’ 창문을 닫고 다시 커튼을 친 브라우닝은 흐트러진 이불을 힐끗 보고는 그대로 부엌으로 향했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가뜩이나 내려간 집 안 온도를 휑하니 빈 냉장고가 더 차갑게 만들었다. 괜히 워켄의 인형들이 홀아비 냄새가 난다며 타박하는 게 아니었다. 달걀과 베이컨, 유통기한이 딱 오늘까지인 식빵과 얼마 남지 않은 잼을 꺼내 아침을 만들다가 뒤늦게 생크림을 꺼내 반쯤 익은 스크램블드에그에 부었다. 생크림과 섞어 고운 연노랑색이 되도록 부드럽게 푼 달걀을 미리 달궈둔 프라이팬의 잔열로 익혀 먹는 것은 워켄의 취향으로, 은근히 귀찮은 조리법을 고집하던 그를 처음 보았을 때 어지간히도 까다로운 남자라며 혀를 내두르던 기억이 났다.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자신도 생크림을 섞은 달걀의 맛이 익숙해질 정도로 워켄에게 맞춰지고 있었다. 솔직히 웬만한 요리는 뭐라도 하나 추가할 때 더 맛있어지는 게 사실이기도 했고.
“오늘은 장을 볼 목록을 적어 가야겠어. 달걀이랑 베이컨, 잼은… 오늘 의뢰비를 받으면 특별히 마멀레이드로 해 볼까. 딸기는 질려서 말이야. 아 참, 커피를 잊으면 안 되지.”
다른 사람이 보면 누구에게 말을 거느냐며 고개를 갸웃거릴 장면이지만, 브라우닝은 익숙하게 혼잣말을 마치며 베이컨과 달걀을 모두 먹어치우고는 소금기에 고통받는 혀를 구하기 위해 토스트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담백한 빵 맛 덕분에 짭조름한 베이컨의 맛에 절여지던 미뢰가 조금 편해지고 나서야 마지막 남은 인스턴트커피로 완전히 입가심을 한 뒤에는 욕실로 가서 양치질과 동시에 어제 하지 못한 샤워까지 모두 끝마쳤다.
“탐정 데이비드 브라우닝입니다.”
이른 시간부터 갑작스레 울려대는 통에 미처 다 털어내지 못한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아내며 받는 전화. 그렇게 워켄이 사라진지 스물 하나째가 되는 아침이 시작되었다.
*
“안녕하세요, 브라우닝씨!”
“이거 오늘도 활기차군. 마거리트양.”
“화사한 웃음은 마거리트 한 다발로 사 주시는 게 어때요?”
“미안하지만 지금은 꽃을 살 여유가 없어서 말이지.”
“아아…… 아직, 워켄씨의 행방을…….”
“음, 뭐,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럼 이만 실례. 의뢰인을 만나러 가야 해서.”
사무소가 위치한 건물 계단을 내려가서 왼쪽으로 곧바로 걸으면 한창 꽃묶음을 바구니에 채우느라 분주한 꽃집이 보인다. 그 와중에도 착실히 손님을 끌어들이는 인사에 ‘사실 여유가 없는 건 이번 달 주머니이기도 해서.’라는 말을 생략한 채로 답하고는, 브라우닝은 쾌활한 꽃집 아가씨를 지나쳐 약속된 장소로 향했다. 사실 지갑 사정이 좋았다 하더라도 마거리트는 사지 않았을 거였지만. 워켄이 그 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나름 귀여운 꽃인 것 같은데…… 흠, 나도 꽃을 특별히 좋아하는 건 아니니 상관없나.’
새삼 바구니 한가득 꽂혀있던 흰색을 떠올리던 브라우닝은 어느새 눈앞에서 식어가는 찻잔을 바라보았다. 쓸데없이 비싸기만 한데다 커피는 팔지 않는 카페라니. 익숙하지 않은 허브티를 억지로 두어 모금 넘기자 한참을 브라우닝이 넘긴 서류와 사진들을 바라보느라 여념이 없던 의뢰인 숙녀─정확히는 의뢰인 대리가 쓰고 있던 안경을 올려 쓰며 까칠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확실히 카트린느가 맞네요. 수고했어요. 직접 찾아다 주었다면 더 좋았을 테지만 계약 내용은 소재지를 알아오는 것까지였으니 이 이후는 우리 쪽에서 해결하죠. 여기, 약속한 의뢰비에요.”
“실수로 다른 것까지 꺼내신 것 같은데.”
“아가씨께서 주시는 별도의 사례에요.”
“아, 그렇습니까.”
제 주인의 말투만큼이나 깐깐하게 생긴 손가락이 스윽 내민 고급스러운 봉투 두 장. ‘왜 소설이고 현실이고 내로라하는 부잣집 아가씨들은 고양이를 애지중지하지 못해서 안달인지.’ 여전히 맛있다곤 느껴지지 않는 허브티를 한 모금 더 들이키며 브라우닝은 암시장의 우리 속에 갇혀있던 하얗고 살이 뒤룩뒤룩 오른 털 뭉치 같던 무언가를 떠올렸다. 그런 꼴로 만들어놓고도 귀엽다고 생각할 수 있는 건가?
‘뭐어, 그렇게 되었다고 버리는 게 더 나쁘긴 하지.’
“……죄송하지만 확실히 사례금을 인계하고 돌아가야 합니다만.”
“아아, 네. 확인해보겠습니다.”
다른 생각을 하는 모양새가 영 거슬렸던지 헛기침을 하며 주위를 환기한 의뢰인은 브라우닝이 흰 봉투를 열어 금액을 확인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나서야 카페를 나섰다. 곧 그 뒷모습이 완전히 거리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자, 브라우닝은 살짝 별도의 사례라는 분홍색 봉투를 열어보고는 곧 맥빠진 웃음을 지었다.
“이번 의뢰인이 이제 열한 살이라고 했던가.”
어쩐지 묘하게 빳빳한 느낌이 다르다 했더니……. 반질반질 빛나는 분홍색 봉투 안에는 그 나잇대의 여자아이들이 좋아할 법한 귀엽고 예쁜 디저트로 유명하다던 제과점 상품권이 들어있었다. 브라우닝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의뢰비와 덤으로 받은 수고비를 가방에 잘 챙겨 넣고 덩굴 장식으로 감싼 우아한 벽걸이 시계를 한 번 쳐다본 다음 자리에서 일어나 모자를 푹 눌러 썼다.
‘뭐, 언젠가는 쓸 일이 있겠지. 그러고 보니 워켄은 단 걸 좋아했던가?’
이미 의뢰인 측에서 계산을 끝내고 나갔다는 종업원의 말에 브라우닝은 지폐를 세는 것을 그만두고 카운터에 비치된 성냥갑을 하나 집어 지갑과 함께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파란 문을 열고 다시 거리로 나서자, 거리에는 아까보다 많은 사람이 북적이고 있었다.
*
“오늘 무슨 사고라도 났나? 여기까지 오는 길이 이렇게나 붐빌 줄이야.”
카페의 산뜻한 파란색 문과는 다르게 낡아빠진 나무문이 손님을 맞이하는 곳은 신문사였다. 사람의 손이 닿아 반질반질하게 색이 바랜 손잡이를 돌리면 여러 번의 여닫음에 길들다 못해 슬슬 헐거워지기 시작하는 문이 힘없이 열렸다. 어쩌면 모서리에 달린 종소리 뒤에 숨어 조금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가볍게 딸랑이는 소리를 밟아 끄면서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안내데스크의 아가씨가 밝게 웃으며 브라우닝을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전화로 자주 듣던 목소리였다. 브라우닝은 가볍게 묵례를 하고는 명함을 한 장 꺼내 내밀었다. 명함을 찬찬히 살피던 아가씨는 잠시 무언가를 떠올리더니 곧 생각났다는 듯이 다시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 일전에 전화해 주셨던 데이비드 브라우닝 씨군요.”
“그러고 보면 초면이군. 아무래도 직접 찾아오는 일은 없었으니까. 보통은 은행을 통해서 대금을 보냈었지.”
“그 건 말인데요, 이쪽에서도 며칠 연장해드리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원칙상…….”
“알고 있네. 어차피 그 사진은 슬슬 내릴 생각이었고… 다른 걸로 바꾸거나.”
“어, 사진은 왜요?”
“사실대로 말하자면 당사자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진이었거든. 하지만 워낙 사진을 안 찍는 양반이라 당장 제출할 수 있는 사진이 그것뿐이었지. 하하.”
“그래서 새 사진을 가져오셨나요?”
“아니, 그건 생각 좀 해 보고. 새 사진의 준비도 안 되었고.”
적당히 손을 내저으며 두루뭉술하게 거절의 표시를 하긴 했지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더는 이 신문사와 거래하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어떻게 멀쩡한 사진을 그렇게 못나 보이게 인쇄할 수 있나 그래. 워켄이 보고 짜증을 내지 않으면 그게 이상할 정도라니까.’ 같은 생각을 하면서 한숨을 내쉬자, 아무래도 안내데스크의 아가씨는 멋대로 이상한 상상이라도 하는지 갑자기 연민의 눈길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번 같은 경우는 미해결인데도 일찍 내리시는 것 같은데…….”
그러한 태도에 브라우닝은 대강 그녀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시나리오─결국 찾지 못하고 마음에 묻어두게 되어버린 사람이라든가 정계의 압박을 받아 더 이상 찾을 수 없게 되는 무언가 어두운 배경─들이 펼쳐지고 있음을 깨닫고는 한 번 더 한숨을 쉬었다. 가끔 있지, 저렇게 3분 드라마를 쓰는 사람. 어쩐지 계속 이쪽을 바라보는 울망울망한 시선이 버티기 힘들어져서, 브라우닝은 곧바로 회계실로 걸음을 옮겨 건물 주인이 부탁한 전단 사본을 대금과 함께 넘겨주고는 신문사를 나섰다.
“아 그래, 커피 사가야지.”
집으로 거의 도착할 즈음, 뒤늦게 장을 봐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탐정은 코트 안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들었다. 빼곡하게 적혀있는 물품 목록을 보자 벌써 어깨가 뻐근해지는 기분이 들었지만 당장 내일 먹을 게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적어도 우유는 배달시켜 먹는 게 좋지 않을까. 최근 자주 사게 된 무거운 액체류는 확실히 성가신 물건이었다. 하지만 그게 또 한 번 쌓이기 시작하면 감당 못 하게 쌓인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는 터라 선뜻 결정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곧 식료품점의 진열대를 한 번 돌 때마다 브라우닝의 쇼핑카트는 우유 하나 정도의 무게가 무의미할 정도로 점점 빼곡하게 채워져 갔다.
“읏차, 자동차를 가지고 갈 걸 그랬군.”
양손에 짐을 가득 든 채 힘겹게 문을 여닫으면서 초인종 아래에 붙어있던 우유 배달 전단까지 떼어낸 브라우닝은 신발을 대충 벗어버리고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 식탁 위에 물건들을 내려놓자마자 의자를 빼어 앉고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빨갛게 비닐봉지 손잡이 자국이 남은 손을 가볍게 털자, 온종일 쌓여가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이런 상황에서 정리 같은 걸 생각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귀찮음에 시름시름 앓아가던 브라우닝의 입에서 결국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쯤 되었으면 슬슬 나타날 때도 되지 않았나. 워켄.”
“미안하게 됐군.”
아무런 기척도 없이 어깨에 얹어진 목소리는 여전히 가벼웠다. 브라우닝은 말없이 웃으며 오른쪽 어깨에 손을 올려, 오랜만에 장갑이 없는 맨손의 감촉을 느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나 눈이 마주치기도 전에 그의 시선은 식탁 위에 늘어진 찬거리로 향해 있었다.
“워켄.”
“그래, 정리하는 것 정도는 도울 테니까.”
“아니, 그게 아니고, 오늘 별다른 일이 없었는지 묻는 거야.”
“질리지도 않는 질문인데 그래. 늘 그렇듯이 아무런 일도 없었네. 온종일 집에 찾아오는 사람 하나 없다니, 여기 오고 나서 느끼는 건데 그쪽은 내게 사교성이 부족하다고 말할 처지가 아니더군.”
“아니, 나는 일하느라 집에 없으니까 말이야. 다들 사무실로 찾아온다고.”
“그러면 다행이겠지만 말이지. 오늘도 냉장고를 열어보니 너무 참담해서. 사실은 손님 하나 없어서 이렇게 사는 게 아닌지 걱정될 정도라서 말이야.”
“그래서 장 봐왔지 않나. 정말, 입맛 까다로운 자네를 위해서 간식까지 사왔건만.”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나는군. 얼른 치우고 저녁 준비나 하지. 보아하니 또 점심은 그냥 넘긴 것 같으니까.”
기껏 사온 마카롱이 무색하게 전혀 그쪽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냉장고 정리를 시작하는 워켄은 완전히 이곳에서의 생활이 몸에 익은 듯했다. 뻔뻔하다고 해야 할지 무심하다고 해야 할지. 솔직한 감상을 말하자면 혼자 집에 있는 것보다야 덜 따분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잔소리는 사양하고 싶달까. 그런 심정이었다. 그래서 브라우닝이 나름의 복수로, 얌전히 앉아서 워켄이 요리에 쓸 식재료 외에 다른 것을 다 정리할 때까지 기다리면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자 워켄은 예상대로 불만스러운 표정이 밴 얼굴로 뒤돌아섰다. 그때 곧바로 마카롱 상자를 내밀며 싱긋 웃어 보이니 새침하게 내밀어 지던 입술이 달싹이다가 다시 닫히는 것이었다. 아마 마카롱이 좋아서 넘어갔다기보다는 ‘이런 걸로 달래려 들다니 내가 애인 줄 아느냐.’라고 한소리 하려다가 지쳐버린 것 같았지만, 어쨌거나 브라우닝은 소소하게나마 워켄을 이겨보았다는 생각에 조금은 기분이 좋아졌다.
“사진은 내리고 왔나?”
“아아, 어차피 기간도 끝났고. 사진 원본도 다시 받아왔네.”
“그래. 고생했네.”
“그래서 말인데, 아직도 내게 말해줄 생각은 없나? 자네가 이러는 이유.”
“브라우닝.”
“아, 그래 알았어. 알았다고. 어지간히도 비밀이 많은 남자로군.”
물론 평소에는 이렇게 이쪽에서 먼저 꼬리를 내려주곤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 호기심마저 완전히 접지는 못하는 것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워켄이 부탁한 의뢰와 그에 인한 동거생활이 오늘로 21일째였다. 더군다나 브라우닝이 알고 있는 워켄이라는 남자는 나름 촉망받는 직업에, 지금까지 지켜봐 온 바로는 누구에게 원한 살 일을 할 만한 위인도 아니다. 평소에 자질구레한 일거리를 맡아 부산스럽게 뛰어다니던 브라우닝과 비교하면 오히려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런 그가 갑작스럽게 자신의 실종신고를 내고, 알리바이를 만들어달라며 찾아와서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마치 펄프 소설에나 나올 법한 전개였다. 차라리 의뢰만 받고 따로 살았으면 모르되 태연하게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니 계속해서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보 제공량에 따라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달라지지 않겠어?”
“지금 이 정도로도 충분해. 어느 정도는 시간을 벌었지. 사실 지금 당장 떠나도 괜찮을 정도니까.”
“정말이지 모를 남자군. 자네는.”
“그런 나를 도와주는 당신도, 꽤 모를 사람이야.”
“그런가.”
“위험한 일 싫어하잖나.”
“이거 위험한 의뢰였나?!”
“글쎄. 하지만 무슨 일인지 확실하지 못한데도 선뜻 의뢰를 받아줬으니 말이지. 안전한 고양이 찾기, 불륜 뒷조사만 맡던 것 같은데.”
“여기선 이 정도 일거리밖에 안 들어오니까. 그나저나 계속 서서 이야기하기도 뭐한데 저녁은 아직인가?”
타이밍 좋게도, 브라우닝이 배를 쓰다듬자마자 꼬르륵하는 소리가 둘 사이에 퍼졌다.
*
식사 후의 티타임이라 하면 보통 따끈한 음료와 곁들일 간식 한 두 가지를 사이에 두고 서로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그런 소소하면서도 어딘지 훈훈한 느낌이 들게 하는 일상적인 시간을 뜻하는 것이겠지만, 브라우닝의 집에서 이루어지는 티타임은 야근을 앞두고 억지로 몸을 각성시킬 에스프레소를 제조하는 시간을 의미했다. 대화를 하는 티타임이란 것은 혼자 살고 있는 브라우닝에게 있어 아직은 누릴 수 없는 영역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식구가 하나 더 늘어난 지금은 충분히 그 시간을 즐기고 있느냐고 하면, 그 대답은 아니오. 식기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마저 나지 않는 티타임은 식사 시간보다도 더한 정적이 깔리는 시간이었다. 브라우닝은 오늘따라 그 정적을 깨트리고 싶어졌다. 원체 워켄이 조용한 사람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사람이 이렇게 눈앞에 있는데 묵묵히 차만 마시다니 이래서야 인형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워켄.”
“듣고 있네.”
“남들 눈에는 우리 사이가 생각보다 각별해 보였었나 봐.”
뜬금없는 말에 마카롱을 집어 들던 워켄의 손가락이 멈춘다. 그러나 이내 실없는 소리라고 판단했는지 다시 입가로 가져온 마카롱을 한 입 베어 문다. 그 모습에 브라우닝은 새로 산 커피믹스를 꺼내 뜯으며 우물거렸다. 그냥, 그렇다고. 확실히 실없는 소리가 맞지 뭐. 순식간에 맞은편의 홍차 향을 덮어버리는 쓰고 단 향을 후후 불고서 브라우닝은 티스푼을 살짝 개수대로 던져넣었다.
“우리가 그렇게 친해 보였던가.”
“자네는 아니라고 생각하나?”
“애초에 친하고 말고 하는 이야기를 하던 사이는 아니었지.”
“하하, 역시 그런가.”
“게다가 나 혼자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친한 것도 아니고 말이지.”
“나는 자네랑 꽤 친해지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
워켄은 대답 대신 조용히 마카롱을 씹었다. 그래서 브라우닝도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워켄은 신중했으나, 그렇다고 노인들처럼 한참 뜸을 들이며 느릿느릿 말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는 건 이 이상 대답을 하지 않겠다는 의미일 뿐이다. 역시 친해지려면 멀었나? 브라우닝은 멋쩍게 턱을 긁적이며 딴청을 부렸다. 하기야 워켄의 말마따나 혼자 친근하게 느낀들 의미는 없을 테다. ‘다만 아까 「나」라고 말한 게 걸리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마카롱을 향해 손을 뻗자, 간소한 차이로 먼저 손을 뻗었던 워켄이 손을 거두며 그 옆의 마카롱을 집으며 말했다.
“……그럼, 그렇게 생각하든지.”
뜻밖의 대답에 브라우닝은 그만 마카롱 사이에 손가락을 꽂아버렸다.
*
오늘은 하루가 유난히 길다고 생각했다. 워켄이 샤워하는 소리를 들으며 브라우닝은 뒤늦게 오늘 자 신문을 펼쳐보았다. 딱히, 오늘이라고 특별한 사건은 없었다. 하기야 매일 사건이 일어난다면 어디 무서워서 살기야 하겠나 싶어 테이블 위를 더듬거렸다. 마카롱 두어 개가 아직 남아있었다. 또 먹기엔 너무 달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래도 입이 심심한 기분이 들어─그도 그럴 것이 비흡연자인 워켄을 배려한답시고 집 안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게 된 것이 거의 한 달이 되어가는 중이다─그중에서 반절만 남은 마카롱을 집어 들었다. 어딘가의 수사관 흉내를 낼 생각은 없었으나 사건 현장에 떨어진 먹거리를 주워 거기에 남은 잇자국을 살펴보는 일이란 게 워낙 정형화된 소재라 머릿속에서는 저절로 브라우닝 자신의 행동과 책 속 문장이 일치해갔다. 한 입 먹힌 마카롱의 반편은 꽤나 고른 선으로 패여 있었다. 치열까지 지독하게 그답다는 생각에 브라우닝은 블루베리 맛의 보라색 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뾰족하게 남은 끝을 두어 번 톡톡, 입술에 대어보고는 그대로 입안에 넣어 씹었다. 그 자체로는 별것도 아닌 일인데, 어쩐지 씹을수록 귀 끝이 뜨거웠다.
“브라우닝. 가서 씻게.”
마카롱의 단맛이 사라질 즈음에 욕실 문이 열렸다. 따듯한 물을 끼얹어 더운 김이 오르는 그때에는 워켄이 친근하게 느껴지곤 했다. 항상 서늘한 거리를 유지하려고 하는 그가 유일하게 온기를 내뿜는 때라서 그런지도 몰랐다. 물론 그 잠시간의 온기는 브라우닝이 뒤이어 씻고 나오는 사이에 사라지곤 했기에 단숨에 워켄에 대한 호감도를 높일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스무 번을 넘게 느낀 온기였다. 잠도 그 이상으로 같이 잤고, 같이 밥을 먹은 횟수는 그보다 더 많았다. 얼굴을 보고 말을 섞은 수는, 의뢰를 받기 전부터 꾸준히 이어져 왔으니 조금쯤은 사적인 관심을 갖게 될 만도 하다고, 그렇게 생각한 브라우닝은 워켄의 손을 잡았다.
“워켄.”
“아직 물기가 남아있다만.”
“자네가 떠날 때에…… 나도 데려갈 생각은 없나?”
“…….”
얇은 입매에서 엷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기야 저것이 보통의 반응이다. 브라우닝은 잡았던 손을 놓고 기지개를 쭉 켰다. 요즘 부쩍 샤워 시간이 는 것 같다고, 아랫집에서 무심결에 안부 인사와 함께 섞어 말했던 내용을 떠올리고는 서둘러 넥타이를 끌었다. 그 손 위에 다시 워켄의 손이 얹어지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넥타이는 세탁 바구니 안에 던져졌을 터였다.
“데이빗 브라우닝.”
“어? 으응.”
“현실은 자네가 생각하는 소설 같은 게 아닐세. 이건 자네가 해피엔딩으로 다가가는 모험 같은 게 아니야.”
“알고 있네. 그냥 해 본 소리야.”
“…….”
“그렇다고 해서 자네가 휘말린 일이 장난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야. 음, 방금 말은 그러니까… 그래서 내가 따라가지 못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런 의미지.”
“그래. 그렇게 생각하니 다행이군.”
“음…… 기분 상했나?”
“전혀.”
생각보다 워켄의 온기는 빨리 식는 편이었던 것 같다. 물기가 뚝뚝 떨어지던 머리카락도 어느새 어깨에 걸친 수건 위에서 가닥가닥 나뉠 정도로 말라가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평소의 메마른 워켄으로 돌아가는 건가.’ 자연스럽게 의뢰인이라는 단어보다 익숙해진 그의 이름을 입속으로만 굴려보며 넥타이를 소파에 내려놓았다. 쏟아지는 눈빛은 아직 젖어있는 것 같았다. 답지 않았다. 길다면 길지만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워켄이 자신에게 의뢰를 맡긴 탐정 이상의 감정을 가질 수 있을까. 펄프 소설에 나오는 탐정은 남의 마음도 속속들이 알아맞히던데, 현실의 브라우닝 탐정에게는 그런 소질은 아직 없는듯했다.
곧 물기 어린 눈동자는 거두어지고 조용히 브라우닝의 곁에 내려앉았다. 옆에서 자세히 보고 있자니 그마저도 착각이었던 듯 피곤하게 깜박이는 눈꺼풀이 속눈썹으로 작은 그늘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워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브라우닝은 직감적으로 워켄의 입이 열리리라는 것을 알아챘다. 허리를 굽히며 깍지 낀 손에 턱을 괴자 워켄은 입을 열었다. 문득, 오늘이 워켄의 목소리를 제일 많이 들은 날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내가 예정된 날에 떠나고 나서 그 후에 자네를 또 만나게 된다면, 그때의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르네.”
“흐음?”
“그렇게 되면 자네는 내가 실패했구나. 하고 안타까워해 주면 돼.”
“벌써 실패를 생각하는 건가?”
“성공을 생각하든 실패를 생각하든, 알 수 없는 일이야.”
“그래도 곤란하지. 모처럼 내가 이렇게 구해줬는데.”
끝까지 무슨 일인지는 알려주지 않겠다. 인가. 브라우닝은 쓰게 혀를 한 번 찼다. 그야 어디까지나 보수로 얽힌 의뢰인일 뿐이니 너무 많은 것을 알려고 드는 것은 워켄에게도 자신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기는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대체 어떤 일을 하기에 자신을, 그리고 본인까지 잊어버릴 실패한 미래를 계산할 수 있는 건지. 우울함에 발을 담그기 시작한 호기심을 애써 털어버리자 이번에는 어차피 잊어버릴 거라면, 혹은 잊지 않는다 해도 그런 가정이 있다면, 추가 요금을 받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사설탐정으로서의 계산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팁 정도는 받아도 되지 않을까?’ 어쩌면 영영 받을 수 없을지도 모를 감사 인사 대신에.
“워켄.”
잠시 맞대었다 떨어진 입술은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화를 낼 거라면, 의뢰가 끝나고 나서, 또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내게.”
“…….”
“그러니까 꼭 성공하게나.”
“씻기나 하게.”
어물거리는 목소리에 아까와 같은 덤덤함은 없었다. 브라우닝은 자신을 지나쳐 방으로 향하는 워켄의 뒷모습과 방문 옆에 걸려있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세 시간쯤 남은 오늘이 천천히 앞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게 시계가 정각에 겹치면, 또다시 시작되겠지.
당신이 사라진 스무하루.
그리고 앞으로 사라질 열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