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우닝은 평소처럼 인형의 여관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이미 죽은 몸이라 폐암이라든가 간접흡연으로 인한 기관지염에 걸릴 일은 없었지만, 그 연기의 냄새만큼은 똑같이 독했기 때문에 누가 뭐라 하기도 전에 자연스럽게 먼저 몸에 배게 만든 습관이었다.
담배 연기를 내뿜던 브라우닝은 문득 자신의 옆에 있는 창에 시선이 갔다. 보통은 커튼으로 가려져 있던 것이 오늘은 창문까지 활짝 열려있었다. 이런 곳에서 햇빛을 받으려고 열어두었을 리는 없고, 환기라도 시킬 셈인가 싶어 슬쩍 안을 들여다보았다. 안에 누군가가 있다면 아무래도 담배를 끄든지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겨야 할 테니까. ‘아직 반절이나 남았는데 말이지…….’ 손가락으로 툭툭 담뱃재를 떨어트리며 보니 얇은 공책 몇 권이 쌓여있는 테이블을 비롯해 전체적으로 작은 가구들이 옹기종기 배치되어 있었다. 어린 전사들의 방이라면 서둘러 자리를 피해 주는 게 맞겠다고 생각하던 참에 의자 안에서 튀어나온 두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확실히 짧고 가느다란 아이의 다리였으나, 브라우닝은 두 다리의 미묘하게 꼿꼿하고 정적인 움직임을 눈치챘다.
아니나 다를까 의자에 푹 파묻혔던 몸을 일으켜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반짝이는 무기질의 것이었다.
*
“워켄!”
방문을 벌컥 열며 외치자 흠칫 놀라는 뒷모습에 그제야 조금 멋쩍은 마음이 들었다. 어째서인지 머리만 덜렁 남은 도니타의 얼굴을 매만지고 있었던 듯한데, 놀라던 표정은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짧은 시간 동안 불쾌한 표정으로 변해갔다. 아, 그러니까, 저기, 미안하네……. 재빨리 사과하며 조용히 문을 닫자 워켄의 표정은 다시 평소와 같이 무뚝뚝한 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누가 저 남자는 표정이 없다고 한단 말인가. 저렇게 다양하게 변하는데. 그게 좀 부정적인 영역이긴 해도. 코트를 벗어 걸다가 갑자기 피식 웃는 브라우닝을 보며 워켄의 눈썹이 티나지 않게 조금 움찔거렸다.
“그래서, 무슨 일로 부른 거지.”
“아, 그게 말이야 이번에 내 새로운 기억을 찾게 된다고 들어서.”
“축하를 바라는 건가?”
“말하자면 그렇지.”
“축하하네. 그리고 앞으로는 좀 더 조용히 축하해달라고 하고.”
“매정하구먼. 이번에야말로 자네와 나의 연결고리 같은 게 생길지도 모르는데.”
“그것과 이건 별개의 문제니까.”
어지간히도 매정한 페어였다. 하기야, 이 남자에게 다정한 웃음이라든가 자신처럼 호들갑을 떨며 축하의 말을 들을 거라는 기대는 하나도 하지 않았다. 워켄의 반응은 정확히 브라우닝의 예상과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게다가 실로 워켄스러운 대답이라서, 브라우닝은 아쉬운 와중에도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그런데 워켄, 만약에 내 세 번째 기억에서 우리 사이가 아주 나쁘게 나오면 어떻게 할 텐가?”
“의도를 모르겠는 질문이군.”
“그냥, 만약에. 만약에. 라는 거지.”
워켄은 답이 없었다. 도니타를 점검하던 손이 멈춰있는 걸로 봐선 나름대로 머릿속에서 가설을 세우고 자신의 행동을 예측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생각해보면 자신이 무얼 물어보든 웬만해서는 쓸데없는 질문이라고는 하지 않는 것이 워켄의 좋은 점이었다. 어떤 대답이 나올지 브라우닝은 제법 흥미로운 눈으로 워켄을 바라보았다. 입술이 열릴 듯 말 듯 두어 번 달싹이더니 조금 뜸을 들이다 열렸다.
“그런 건 걱정 안 해도 된다네. 지금까지 안 나왔으니까.”
“자네답지 않은 대답인걸. 그리고 희망을 좀 가지게.”
“우리 사이가 최악으로 치닫더라도 서로 알게 되는 걸 희망이라고 부른다면, 자네는 상당히 긍정적이군. 브라우닝.”
“아니 꼭 뭐 그렇다기보다는. 그럼 자네는 우리가 영원히 남남이었으면 좋겠다고 여기는 건가?”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나는 어차피 자네와의 관계 말고도 생각해야 할 게 많으니까.”
워켄의 손이 다시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쁠 때 건드려서 짜증이 난 건가. 평소 이상으로 조금 더 무심한 대답에 브라우닝은 터덜터덜 침대로 걸어가 앉았다. 읽을 책이라도 들고 올 걸 그랬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지만 공교롭게도 책꽂이는 워켄의 뒤편에 있었다. 새삼 저쪽으로 다시 걸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시 담배를 피우러 나가기도 싫었고, 잠을 자기에도 이른 시간이다. 그저 가만히 워켄의 기분이 언제 풀리려나 하고 지켜보는 것밖엔 도리가 없어 보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 워켄의 손에서 공구가 내려놓아 지고 금색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빗겨주는 게 이제 슬슬 끝나가는구나 싶어 다시 말을 걸어보려는 찰나, 그것보다 조금 더 빠르게 워켄이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말했듯이 나는 자네 말고도 생각할 게 많네.”
“응. 그랬지.”
“그러니까 새삼 자네와 나의 관계가 그런 식으로 얽히면 곤란해. 될 수 있으면 나는 우리의 관계가 지금같이 유지되기를 바란다고나 할까.”
“그것도 꽤 의외의 대답이군.”
“그쪽이 내게 효율적일 뿐이야.”
여전히 담담한 말투로, 워켄은 점검이 끝난 도니타의 머리를 흰 천으로 감싸들었다. 도니타의 방에 다녀오지. 조용히 문을 열고 조용히 문을 닫는 동작은 참으로 세심했다. 그제야 브라우닝은 긴장을 풀고 침대에 편히 드러누울 수 있었다.
이 글은 예전에 열렸던 언라이트 글합작:한 문장으로 시작하기 합작에 내려고 쓰던 글이었습니다. 한 문장을 뽑아 그것을 시작으로 정해진 내용 없이 자유롭게 쓰는 합작이었지요.
그렇기에 이 글도 그 합작의 주제였던 '당신이 사라진 지 정확히 스무날째 되는 밤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만, 그 합작에 최종적으로 제출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문제시 비공개나 보호글 처리가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사라진 지 정확히 스무날째 되는 밤이다.
“이거, 슬슬 유통기한이 간당간당하잖아?”
복도까지 들어찬 밤공기에 입김을 흘리며 브라우닝은 현관 앞의 신문을 주워들었다. 줍기 전의 신문의 모습은 아침 일찍 집을 나서다가 발로 한 번 걷어차 귀퉁이가 조금 구겨진 것 외에는 신문배달부 청년이 계단을 오르내리며 던져둔 모양새 그대로였다. ‘오늘은 아무도 방문하지 않은 건가.’ 이제는 유효기간이 거의 끝나가는, 활자라는 형태로 눌러 찍힌 하루의 새로운─그리고 곧 구식이 되어버릴─소식을 어떻게 처리할까 하다가 멀리서 들려오는 고양이 울음소리를 듣고는 집 안으로 가져가기로 마음먹었다. 괜히 밖에 내버려두었다가 고양이가 마구 긁고 찢어대어 복도가 엉망이 되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다. 열쇠를 구멍에 밀어 넣고 문고리를 돌리다가 어느새 손목에 감긴 시계가 12시를 가리키는 것을 본 브라우닝은 싸늘하게 소름이 돋는 팔을 양손으로 문지르며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 커피 사두는 걸 잊었군.”
마지막 하나 남은 인스턴트커피는 아침에 마시기로 하고 접대용 티백을 꺼내 뜨거운 물에 담갔다. 그다지 취향은 아닌 재스민 향기가 올라오는 찻잔을 적당히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신문을 펼치면 언제나 비슷비슷한 기사들이 지면을 빼곡히 채우고, 가장 시선이 잘 가는 곳에는 쓸데없이 과시욕만 불러일으키는 물건들의 광고가 크게 박혀 있었다. 페이지를 건성건성 모두 넘기고 나자 힘이 빠져서 그대로 고개를 뒤로 젖혔다.
푸우─ 한숨인지 뭔지 모를 것을 내뱉고 다시 신문을 펼쳤다. 실종자를 찾는 투고란은 대충 넘기는 것만으로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원래 직업도 직업이긴 했지만, 최근에는 매일같이 들여다보고 있었으니까 이제 손에 익은 것이다. 펼쳐 든 페이지를 보자 자그맣게 실린 어린아이와 노인들의 얼굴 사이에 자리하던 익숙한 얼굴이 없었다. 브라우닝은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피곤함에 젖은 눈을 끔벅거리고 봤지만 역시 없었다. 잘못 보거나 지나친 게 아니었다. 문득 신문 맨 위에 적힌 날짜에 눈이 갔다. 아, 그렇군. 기간이 다 된 거군. 브라우닝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그저 돈을 더 입금하지 않았기 때문에, 끊겼을 뿐이다.
「워켄」
워켄이 이 도시에서 사라진 지 스무날째 되는 밤이 지나갔다.
“으하암~”
침대 위에서 몸을 쭉 뻗으며 뒹굴던 브라우닝의 눈에 창문 너머에서 들어오는 바람에 나부끼는 커튼이 보였다. ‘분명 단단히 쳐 두었을 텐데. 감기라도 걸리면 곤란하니까 말이야.’ 창문을 닫고 다시 커튼을 친 브라우닝은 흐트러진 이불을 힐끗 보고는 그대로 부엌으로 향했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가뜩이나 내려간 집 안 온도를 휑하니 빈 냉장고가 더 차갑게 만들었다. 괜히 워켄의 인형들이 홀아비 냄새가 난다며 타박하는 게 아니었다. 달걀과 베이컨, 유통기한이 딱 오늘까지인 식빵과 얼마 남지 않은 잼을 꺼내 아침을 만들다가 뒤늦게 생크림을 꺼내 반쯤 익은 스크램블드에그에 부었다. 생크림과 섞어 고운 연노랑색이 되도록 부드럽게 푼 달걀을 미리 달궈둔 프라이팬의 잔열로 익혀 먹는 것은 워켄의 취향으로, 은근히 귀찮은 조리법을 고집하던 그를 처음 보았을 때 어지간히도 까다로운 남자라며 혀를 내두르던 기억이 났다.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자신도 생크림을 섞은 달걀의 맛이 익숙해질 정도로 워켄에게 맞춰지고 있었다. 솔직히 웬만한 요리는 뭐라도 하나 추가할 때 더 맛있어지는 게 사실이기도 했고.
“오늘은 장을 볼 목록을 적어 가야겠어. 달걀이랑 베이컨, 잼은… 오늘 의뢰비를 받으면 특별히 마멀레이드로 해 볼까. 딸기는 질려서 말이야. 아 참, 커피를 잊으면 안 되지.”
다른 사람이 보면 누구에게 말을 거느냐며 고개를 갸웃거릴 장면이지만, 브라우닝은 익숙하게 혼잣말을 마치며 베이컨과 달걀을 모두 먹어치우고는 소금기에 고통받는 혀를 구하기 위해 토스트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담백한 빵 맛 덕분에 짭조름한 베이컨의 맛에 절여지던 미뢰가 조금 편해지고 나서야 마지막 남은 인스턴트커피로 완전히 입가심을 한 뒤에는 욕실로 가서 양치질과 동시에 어제 하지 못한 샤워까지 모두 끝마쳤다.
“탐정 데이비드 브라우닝입니다.”
이른 시간부터 갑작스레 울려대는 통에 미처 다 털어내지 못한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아내며 받는 전화. 그렇게 워켄이 사라진지 스물 하나째가 되는 아침이 시작되었다.
*
“안녕하세요, 브라우닝씨!”
“이거 오늘도 활기차군. 마거리트양.”
“화사한 웃음은 마거리트 한 다발로 사 주시는 게 어때요?”
“미안하지만 지금은 꽃을 살 여유가 없어서 말이지.”
“아아…… 아직, 워켄씨의 행방을…….”
“음, 뭐,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럼 이만 실례. 의뢰인을 만나러 가야 해서.”
사무소가 위치한 건물 계단을 내려가서 왼쪽으로 곧바로 걸으면 한창 꽃묶음을 바구니에 채우느라 분주한 꽃집이 보인다. 그 와중에도 착실히 손님을 끌어들이는 인사에 ‘사실 여유가 없는 건 이번 달 주머니이기도 해서.’라는 말을 생략한 채로 답하고는, 브라우닝은 쾌활한 꽃집 아가씨를 지나쳐 약속된 장소로 향했다. 사실 지갑 사정이 좋았다 하더라도 마거리트는 사지 않았을 거였지만. 워켄이 그 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나름 귀여운 꽃인 것 같은데…… 흠, 나도 꽃을 특별히 좋아하는 건 아니니 상관없나.’
새삼 바구니 한가득 꽂혀있던 흰색을 떠올리던 브라우닝은 어느새 눈앞에서 식어가는 찻잔을 바라보았다. 쓸데없이 비싸기만 한데다 커피는 팔지 않는 카페라니. 익숙하지 않은 허브티를 억지로 두어 모금 넘기자 한참을 브라우닝이 넘긴 서류와 사진들을 바라보느라 여념이 없던 의뢰인 숙녀─정확히는 의뢰인 대리가 쓰고 있던 안경을 올려 쓰며 까칠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확실히 카트린느가 맞네요. 수고했어요. 직접 찾아다 주었다면 더 좋았을 테지만 계약 내용은 소재지를 알아오는 것까지였으니 이 이후는 우리 쪽에서 해결하죠. 여기, 약속한 의뢰비에요.”
“실수로 다른 것까지 꺼내신 것 같은데.”
“아가씨께서 주시는 별도의 사례에요.”
“아, 그렇습니까.”
제 주인의 말투만큼이나 깐깐하게 생긴 손가락이 스윽 내민 고급스러운 봉투 두 장. ‘왜 소설이고 현실이고 내로라하는 부잣집 아가씨들은 고양이를 애지중지하지 못해서 안달인지.’ 여전히 맛있다곤 느껴지지 않는 허브티를 한 모금 더 들이키며 브라우닝은 암시장의 우리 속에 갇혀있던 하얗고 살이 뒤룩뒤룩 오른 털 뭉치 같던 무언가를 떠올렸다. 그런 꼴로 만들어놓고도 귀엽다고 생각할 수 있는 건가?
‘뭐어, 그렇게 되었다고 버리는 게 더 나쁘긴 하지.’
“……죄송하지만 확실히 사례금을 인계하고 돌아가야 합니다만.”
“아아, 네. 확인해보겠습니다.”
다른 생각을 하는 모양새가 영 거슬렸던지 헛기침을 하며 주위를 환기한 의뢰인은 브라우닝이 흰 봉투를 열어 금액을 확인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나서야 카페를 나섰다. 곧 그 뒷모습이 완전히 거리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자, 브라우닝은 살짝 별도의 사례라는 분홍색 봉투를 열어보고는 곧 맥빠진 웃음을 지었다.
“이번 의뢰인이 이제 열한 살이라고 했던가.”
어쩐지 묘하게 빳빳한 느낌이 다르다 했더니……. 반질반질 빛나는 분홍색 봉투 안에는 그 나잇대의 여자아이들이 좋아할 법한 귀엽고 예쁜 디저트로 유명하다던 제과점 상품권이 들어있었다. 브라우닝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의뢰비와 덤으로 받은 수고비를 가방에 잘 챙겨 넣고 덩굴 장식으로 감싼 우아한 벽걸이 시계를 한 번 쳐다본 다음 자리에서 일어나 모자를 푹 눌러 썼다.
‘뭐, 언젠가는 쓸 일이 있겠지. 그러고 보니 워켄은 단 걸 좋아했던가?’
이미 의뢰인 측에서 계산을 끝내고 나갔다는 종업원의 말에 브라우닝은 지폐를 세는 것을 그만두고 카운터에 비치된 성냥갑을 하나 집어 지갑과 함께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파란 문을 열고 다시 거리로 나서자, 거리에는 아까보다 많은 사람이 북적이고 있었다.
*
“오늘 무슨 사고라도 났나? 여기까지 오는 길이 이렇게나 붐빌 줄이야.”
카페의 산뜻한 파란색 문과는 다르게 낡아빠진 나무문이 손님을 맞이하는 곳은 신문사였다. 사람의 손이 닿아 반질반질하게 색이 바랜 손잡이를 돌리면 여러 번의 여닫음에 길들다 못해 슬슬 헐거워지기 시작하는 문이 힘없이 열렸다. 어쩌면 모서리에 달린 종소리 뒤에 숨어 조금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가볍게 딸랑이는 소리를 밟아 끄면서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안내데스크의 아가씨가 밝게 웃으며 브라우닝을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전화로 자주 듣던 목소리였다. 브라우닝은 가볍게 묵례를 하고는 명함을 한 장 꺼내 내밀었다. 명함을 찬찬히 살피던 아가씨는 잠시 무언가를 떠올리더니 곧 생각났다는 듯이 다시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 일전에 전화해 주셨던 데이비드 브라우닝 씨군요.”
“그러고 보면 초면이군. 아무래도 직접 찾아오는 일은 없었으니까. 보통은 은행을 통해서 대금을 보냈었지.”
“그 건 말인데요, 이쪽에서도 며칠 연장해드리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원칙상…….”
“알고 있네. 어차피 그 사진은 슬슬 내릴 생각이었고… 다른 걸로 바꾸거나.”
“어, 사진은 왜요?”
“사실대로 말하자면 당사자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진이었거든. 하지만 워낙 사진을 안 찍는 양반이라 당장 제출할 수 있는 사진이 그것뿐이었지. 하하.”
“그래서 새 사진을 가져오셨나요?”
“아니, 그건 생각 좀 해 보고. 새 사진의 준비도 안 되었고.”
적당히 손을 내저으며 두루뭉술하게 거절의 표시를 하긴 했지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더는 이 신문사와 거래하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어떻게 멀쩡한 사진을 그렇게 못나 보이게 인쇄할 수 있나 그래. 워켄이 보고 짜증을 내지 않으면 그게 이상할 정도라니까.’ 같은 생각을 하면서 한숨을 내쉬자, 아무래도 안내데스크의 아가씨는 멋대로 이상한 상상이라도 하는지 갑자기 연민의 눈길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번 같은 경우는 미해결인데도 일찍 내리시는 것 같은데…….”
그러한 태도에 브라우닝은 대강 그녀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시나리오─결국 찾지 못하고 마음에 묻어두게 되어버린 사람이라든가 정계의 압박을 받아 더 이상 찾을 수 없게 되는 무언가 어두운 배경─들이 펼쳐지고 있음을 깨닫고는 한 번 더 한숨을 쉬었다. 가끔 있지, 저렇게 3분 드라마를 쓰는 사람. 어쩐지 계속 이쪽을 바라보는 울망울망한 시선이 버티기 힘들어져서, 브라우닝은 곧바로 회계실로 걸음을 옮겨 건물 주인이 부탁한 전단 사본을 대금과 함께 넘겨주고는 신문사를 나섰다.
“아 그래, 커피 사가야지.”
집으로 거의 도착할 즈음, 뒤늦게 장을 봐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탐정은 코트 안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들었다. 빼곡하게 적혀있는 물품 목록을 보자 벌써 어깨가 뻐근해지는 기분이 들었지만 당장 내일 먹을 게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적어도 우유는 배달시켜 먹는 게 좋지 않을까. 최근 자주 사게 된 무거운 액체류는 확실히 성가신 물건이었다. 하지만 그게 또 한 번 쌓이기 시작하면 감당 못 하게 쌓인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는 터라 선뜻 결정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곧 식료품점의 진열대를 한 번 돌 때마다 브라우닝의 쇼핑카트는 우유 하나 정도의 무게가 무의미할 정도로 점점 빼곡하게 채워져 갔다.
“읏차, 자동차를 가지고 갈 걸 그랬군.”
양손에 짐을 가득 든 채 힘겹게 문을 여닫으면서 초인종 아래에 붙어있던 우유 배달 전단까지 떼어낸 브라우닝은 신발을 대충 벗어버리고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 식탁 위에 물건들을 내려놓자마자 의자를 빼어 앉고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빨갛게 비닐봉지 손잡이 자국이 남은 손을 가볍게 털자, 온종일 쌓여가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이런 상황에서 정리 같은 걸 생각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귀찮음에 시름시름 앓아가던 브라우닝의 입에서 결국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쯤 되었으면 슬슬 나타날 때도 되지 않았나. 워켄.”
“미안하게 됐군.”
아무런 기척도 없이 어깨에 얹어진 목소리는 여전히 가벼웠다. 브라우닝은 말없이 웃으며 오른쪽 어깨에 손을 올려, 오랜만에 장갑이 없는 맨손의 감촉을 느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나 눈이 마주치기도 전에 그의 시선은 식탁 위에 늘어진 찬거리로 향해 있었다.
“워켄.”
“그래, 정리하는 것 정도는 도울 테니까.”
“아니, 그게 아니고, 오늘 별다른 일이 없었는지 묻는 거야.”
“질리지도 않는 질문인데 그래. 늘 그렇듯이 아무런 일도 없었네. 온종일 집에 찾아오는 사람 하나 없다니, 여기 오고 나서 느끼는 건데 그쪽은 내게 사교성이 부족하다고 말할 처지가 아니더군.”
“아니, 나는 일하느라 집에 없으니까 말이야. 다들 사무실로 찾아온다고.”
“그러면 다행이겠지만 말이지. 오늘도 냉장고를 열어보니 너무 참담해서. 사실은 손님 하나 없어서 이렇게 사는 게 아닌지 걱정될 정도라서 말이야.”
“그래서 장 봐왔지 않나. 정말, 입맛 까다로운 자네를 위해서 간식까지 사왔건만.”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나는군. 얼른 치우고 저녁 준비나 하지. 보아하니 또 점심은 그냥 넘긴 것 같으니까.”
기껏 사온 마카롱이 무색하게 전혀 그쪽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냉장고 정리를 시작하는 워켄은 완전히 이곳에서의 생활이 몸에 익은 듯했다. 뻔뻔하다고 해야 할지 무심하다고 해야 할지. 솔직한 감상을 말하자면 혼자 집에 있는 것보다야 덜 따분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잔소리는 사양하고 싶달까. 그런 심정이었다. 그래서 브라우닝이 나름의 복수로, 얌전히 앉아서 워켄이 요리에 쓸 식재료 외에 다른 것을 다 정리할 때까지 기다리면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자 워켄은 예상대로 불만스러운 표정이 밴 얼굴로 뒤돌아섰다. 그때 곧바로 마카롱 상자를 내밀며 싱긋 웃어 보이니 새침하게 내밀어 지던 입술이 달싹이다가 다시 닫히는 것이었다. 아마 마카롱이 좋아서 넘어갔다기보다는 ‘이런 걸로 달래려 들다니 내가 애인 줄 아느냐.’라고 한소리 하려다가 지쳐버린 것 같았지만, 어쨌거나 브라우닝은 소소하게나마 워켄을 이겨보았다는 생각에 조금은 기분이 좋아졌다.
“사진은 내리고 왔나?”
“아아, 어차피 기간도 끝났고. 사진 원본도 다시 받아왔네.”
“그래. 고생했네.”
“그래서 말인데, 아직도 내게 말해줄 생각은 없나? 자네가 이러는 이유.”
“브라우닝.”
“아, 그래 알았어. 알았다고. 어지간히도 비밀이 많은 남자로군.”
물론 평소에는 이렇게 이쪽에서 먼저 꼬리를 내려주곤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 호기심마저 완전히 접지는 못하는 것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워켄이 부탁한 의뢰와 그에 인한 동거생활이 오늘로 21일째였다. 더군다나 브라우닝이 알고 있는 워켄이라는 남자는 나름 촉망받는 직업에, 지금까지 지켜봐 온 바로는 누구에게 원한 살 일을 할 만한 위인도 아니다. 평소에 자질구레한 일거리를 맡아 부산스럽게 뛰어다니던 브라우닝과 비교하면 오히려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런 그가 갑작스럽게 자신의 실종신고를 내고, 알리바이를 만들어달라며 찾아와서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마치 펄프 소설에나 나올 법한 전개였다. 차라리 의뢰만 받고 따로 살았으면 모르되 태연하게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니 계속해서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보 제공량에 따라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달라지지 않겠어?”
“지금 이 정도로도 충분해. 어느 정도는 시간을 벌었지. 사실 지금 당장 떠나도 괜찮을 정도니까.”
“정말이지 모를 남자군. 자네는.”
“그런 나를 도와주는 당신도, 꽤 모를 사람이야.”
“그런가.”
“위험한 일 싫어하잖나.”
“이거 위험한 의뢰였나?!”
“글쎄. 하지만 무슨 일인지 확실하지 못한데도 선뜻 의뢰를 받아줬으니 말이지. 안전한 고양이 찾기, 불륜 뒷조사만 맡던 것 같은데.”
“여기선 이 정도 일거리밖에 안 들어오니까. 그나저나 계속 서서 이야기하기도 뭐한데 저녁은 아직인가?”
타이밍 좋게도, 브라우닝이 배를 쓰다듬자마자 꼬르륵하는 소리가 둘 사이에 퍼졌다.
*
식사 후의 티타임이라 하면 보통 따끈한 음료와 곁들일 간식 한 두 가지를 사이에 두고 서로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그런 소소하면서도 어딘지 훈훈한 느낌이 들게 하는 일상적인 시간을 뜻하는 것이겠지만, 브라우닝의 집에서 이루어지는 티타임은 야근을 앞두고 억지로 몸을 각성시킬 에스프레소를 제조하는 시간을 의미했다. 대화를 하는 티타임이란 것은 혼자 살고 있는 브라우닝에게 있어 아직은 누릴 수 없는 영역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식구가 하나 더 늘어난 지금은 충분히 그 시간을 즐기고 있느냐고 하면, 그 대답은 아니오. 식기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마저 나지 않는 티타임은 식사 시간보다도 더한 정적이 깔리는 시간이었다. 브라우닝은 오늘따라 그 정적을 깨트리고 싶어졌다. 원체 워켄이 조용한 사람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사람이 이렇게 눈앞에 있는데 묵묵히 차만 마시다니 이래서야 인형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워켄.”
“듣고 있네.”
“남들 눈에는 우리 사이가 생각보다 각별해 보였었나 봐.”
뜬금없는 말에 마카롱을 집어 들던 워켄의 손가락이 멈춘다. 그러나 이내 실없는 소리라고 판단했는지 다시 입가로 가져온 마카롱을 한 입 베어 문다. 그 모습에 브라우닝은 새로 산 커피믹스를 꺼내 뜯으며 우물거렸다. 그냥, 그렇다고. 확실히 실없는 소리가 맞지 뭐. 순식간에 맞은편의 홍차 향을 덮어버리는 쓰고 단 향을 후후 불고서 브라우닝은 티스푼을 살짝 개수대로 던져넣었다.
“우리가 그렇게 친해 보였던가.”
“자네는 아니라고 생각하나?”
“애초에 친하고 말고 하는 이야기를 하던 사이는 아니었지.”
“하하, 역시 그런가.”
“게다가 나 혼자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친한 것도 아니고 말이지.”
“나는 자네랑 꽤 친해지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
워켄은 대답 대신 조용히 마카롱을 씹었다. 그래서 브라우닝도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워켄은 신중했으나, 그렇다고 노인들처럼 한참 뜸을 들이며 느릿느릿 말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는 건 이 이상 대답을 하지 않겠다는 의미일 뿐이다. 역시 친해지려면 멀었나? 브라우닝은 멋쩍게 턱을 긁적이며 딴청을 부렸다. 하기야 워켄의 말마따나 혼자 친근하게 느낀들 의미는 없을 테다. ‘다만 아까 「나」라고 말한 게 걸리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마카롱을 향해 손을 뻗자, 간소한 차이로 먼저 손을 뻗었던 워켄이 손을 거두며 그 옆의 마카롱을 집으며 말했다.
“……그럼, 그렇게 생각하든지.”
뜻밖의 대답에 브라우닝은 그만 마카롱 사이에 손가락을 꽂아버렸다.
*
오늘은 하루가 유난히 길다고 생각했다. 워켄이 샤워하는 소리를 들으며 브라우닝은 뒤늦게 오늘 자 신문을 펼쳐보았다. 딱히, 오늘이라고 특별한 사건은 없었다. 하기야 매일 사건이 일어난다면 어디 무서워서 살기야 하겠나 싶어 테이블 위를 더듬거렸다. 마카롱 두어 개가 아직 남아있었다. 또 먹기엔 너무 달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래도 입이 심심한 기분이 들어─그도 그럴 것이 비흡연자인 워켄을 배려한답시고 집 안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게 된 것이 거의 한 달이 되어가는 중이다─그중에서 반절만 남은 마카롱을 집어 들었다. 어딘가의 수사관 흉내를 낼 생각은 없었으나 사건 현장에 떨어진 먹거리를 주워 거기에 남은 잇자국을 살펴보는 일이란 게 워낙 정형화된 소재라 머릿속에서는 저절로 브라우닝 자신의 행동과 책 속 문장이 일치해갔다. 한 입 먹힌 마카롱의 반편은 꽤나 고른 선으로 패여 있었다. 치열까지 지독하게 그답다는 생각에 브라우닝은 블루베리 맛의 보라색 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뾰족하게 남은 끝을 두어 번 톡톡, 입술에 대어보고는 그대로 입안에 넣어 씹었다. 그 자체로는 별것도 아닌 일인데, 어쩐지 씹을수록 귀 끝이 뜨거웠다.
“브라우닝. 가서 씻게.”
마카롱의 단맛이 사라질 즈음에 욕실 문이 열렸다. 따듯한 물을 끼얹어 더운 김이 오르는 그때에는 워켄이 친근하게 느껴지곤 했다. 항상 서늘한 거리를 유지하려고 하는 그가 유일하게 온기를 내뿜는 때라서 그런지도 몰랐다. 물론 그 잠시간의 온기는 브라우닝이 뒤이어 씻고 나오는 사이에 사라지곤 했기에 단숨에 워켄에 대한 호감도를 높일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스무 번을 넘게 느낀 온기였다. 잠도 그 이상으로 같이 잤고, 같이 밥을 먹은 횟수는 그보다 더 많았다. 얼굴을 보고 말을 섞은 수는, 의뢰를 받기 전부터 꾸준히 이어져 왔으니 조금쯤은 사적인 관심을 갖게 될 만도 하다고, 그렇게 생각한 브라우닝은 워켄의 손을 잡았다.
“워켄.”
“아직 물기가 남아있다만.”
“자네가 떠날 때에…… 나도 데려갈 생각은 없나?”
“…….”
얇은 입매에서 엷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기야 저것이 보통의 반응이다. 브라우닝은 잡았던 손을 놓고 기지개를 쭉 켰다. 요즘 부쩍 샤워 시간이 는 것 같다고, 아랫집에서 무심결에 안부 인사와 함께 섞어 말했던 내용을 떠올리고는 서둘러 넥타이를 끌었다. 그 손 위에 다시 워켄의 손이 얹어지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넥타이는 세탁 바구니 안에 던져졌을 터였다.
“데이빗 브라우닝.”
“어? 으응.”
“현실은 자네가 생각하는 소설 같은 게 아닐세. 이건 자네가 해피엔딩으로 다가가는 모험 같은 게 아니야.”
“알고 있네. 그냥 해 본 소리야.”
“…….”
“그렇다고 해서 자네가 휘말린 일이 장난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야. 음, 방금 말은 그러니까… 그래서 내가 따라가지 못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런 의미지.”
“그래. 그렇게 생각하니 다행이군.”
“음…… 기분 상했나?”
“전혀.”
생각보다 워켄의 온기는 빨리 식는 편이었던 것 같다. 물기가 뚝뚝 떨어지던 머리카락도 어느새 어깨에 걸친 수건 위에서 가닥가닥 나뉠 정도로 말라가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평소의 메마른 워켄으로 돌아가는 건가.’ 자연스럽게 의뢰인이라는 단어보다 익숙해진 그의 이름을 입속으로만 굴려보며 넥타이를 소파에 내려놓았다. 쏟아지는 눈빛은 아직 젖어있는 것 같았다. 답지 않았다. 길다면 길지만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워켄이 자신에게 의뢰를 맡긴 탐정 이상의 감정을 가질 수 있을까. 펄프 소설에 나오는 탐정은 남의 마음도 속속들이 알아맞히던데, 현실의 브라우닝 탐정에게는 그런 소질은 아직 없는듯했다.
곧 물기 어린 눈동자는 거두어지고 조용히 브라우닝의 곁에 내려앉았다. 옆에서 자세히 보고 있자니 그마저도 착각이었던 듯 피곤하게 깜박이는 눈꺼풀이 속눈썹으로 작은 그늘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워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브라우닝은 직감적으로 워켄의 입이 열리리라는 것을 알아챘다. 허리를 굽히며 깍지 낀 손에 턱을 괴자 워켄은 입을 열었다. 문득, 오늘이 워켄의 목소리를 제일 많이 들은 날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내가 예정된 날에 떠나고 나서 그 후에 자네를 또 만나게 된다면, 그때의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르네.”
“흐음?”
“그렇게 되면 자네는 내가 실패했구나. 하고 안타까워해 주면 돼.”
“벌써 실패를 생각하는 건가?”
“성공을 생각하든 실패를 생각하든, 알 수 없는 일이야.”
“그래도 곤란하지. 모처럼 내가 이렇게 구해줬는데.”
끝까지 무슨 일인지는 알려주지 않겠다. 인가. 브라우닝은 쓰게 혀를 한 번 찼다. 그야 어디까지나 보수로 얽힌 의뢰인일 뿐이니 너무 많은 것을 알려고 드는 것은 워켄에게도 자신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기는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대체 어떤 일을 하기에 자신을, 그리고 본인까지 잊어버릴 실패한 미래를 계산할 수 있는 건지. 우울함에 발을 담그기 시작한 호기심을 애써 털어버리자 이번에는 어차피 잊어버릴 거라면, 혹은 잊지 않는다 해도 그런 가정이 있다면, 추가 요금을 받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사설탐정으로서의 계산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팁 정도는 받아도 되지 않을까?’ 어쩌면 영영 받을 수 없을지도 모를 감사 인사 대신에.
“워켄.”
잠시 맞대었다 떨어진 입술은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화를 낼 거라면, 의뢰가 끝나고 나서, 또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내게.”
“…….”
“그러니까 꼭 성공하게나.”
“씻기나 하게.”
어물거리는 목소리에 아까와 같은 덤덤함은 없었다. 브라우닝은 자신을 지나쳐 방으로 향하는 워켄의 뒷모습과 방문 옆에 걸려있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세 시간쯤 남은 오늘이 천천히 앞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어지간히도 어리광이 심한 고양이었다. 아깝지만 그만 피워야겠지. 마지막 한 모금을 급하게 빨곤 재떨이에 담배를 완전히 비벼 끈 후에 파티션으로 가려놓은 싱크대에서 손을 씻었다. 작은 고양이는 거기까지 쫓아와서 놀아달라 보챈다. 적적한 집에 들어온 새 식구는 꽤나 적극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어필해댔다. 저래놓고 자기가 귀찮을 땐 방석 위에서 눈도 끔쩍 안 하는 이 새끼고양이는, 전형적인 고양이의 특성에 어린아이의 제멋대로인 점이 딱 반반씩 섞여 있었다.
“그래, 뭘 하고 놀아줄까?”
“책 읽어주게.”
영상보다는 활자에 더 큰 흥미를 느끼는 이 탐정의 고양이는 동물, 그중에서도 여러 종류의 가축이 그려진 동화책을 앞발로 탁탁 쳐대며 눈을 데굴거린다. 온갖 사건들이 나열된 서류뭉치 옆에 놓인 샛노란 표지는 가벼운 뒷조사에서부터 음험한 거래가 오가는 사무실과는 어울리지 않게 산뜻한 색이었다.
“브냐우닝! 어서!”
“몇 번이나 읽어줬는데 질리지도 않는가 보지 워켄.”
“하지만 동화책은 이것밖에 없으니까 어쩔 수 없잖나.”
“하기야, 그것도 그렇지.”
“그런데 브냐우닝, 여기 나오는 톰은 왜 닭이랑 병아리랑 소랑 양이랑 오리를 데리고 가는거냥? 집도 좁아서 쫓겨나지 않았냥.”
“아마 키워서 먹으려는 거 아닐까.”
“먹어? 톰은 사냥을 한거냥?”
“사람은 사냥하지 않아도 가축을 길러서 잡아먹으니까. 그나저나 확실히 이 동화책 스무 번은 더 읽어준 것 같은데 내일은 새 책을 사다 줄까.”
“새 책…… 물고기가 나오는 책이면 좋겠다냥!”
물고기는커녕 아직 사료도 못 먹는 아가냥이 주제에 어디서 본 건 있는 모양인지 물고기 노래를 불러댄다. 여러모로 신경 써야 할 점이 많긴 하지만, 그래도 역시 데리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조심스럽게 워켄이라고 이름 붙인 새끼고양이를 쓰다듬었다. 쓰다듬어주는 손길이 퍽 마음에 든 건지, 워켄은 조그만 머리를 비벼대며 갸릉거린다.
그러니까, 분명 어제까지 저렇게 웃고 놀았을 텐데.
새로 산 책과 인형, 분유를 들고 돌아왔는데도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한 기분에 불을 켜고 찬찬히 거실을 훑어보자 아니나다를까, 멋대로 자기 거라고 정해버린 방석 위에서 웅크려 잠들어있는 워켄이 있었다. 어째 평소랑 자는 포즈가 다른 것 같은데? 조심스럽게 워켄- 하고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워켄, 오늘은 집에 두고 가서 삐졌나? 하지만 쇼핑을 할 거니까 넌 데려갈 수 없다고 말했잖아.”
“브냐우닝…….”
“자, 새 책도 사왔고 장난감도 사왔으니까. 일어나. 아니면 어디가 아픈가?”
“브냐우닝… 우에에에에엥!”
머리까지 콕 처박고 있는 폼이 예삿일이 아닌 것 같아 옆으로 다가가 톡톡 건드리자 별안간 울음이 터져나온다. 대체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억지로 몸을 뒤집게 만들었더니 조막만한 손톱으로 생채기를 내고는 다시 엎드려버린다. 동물병원에 가봐야 하나. 방석째로 들어 옮길 생각을 하며 짐을 내려놓는데, 별안간 가느다란 울음소리가 흘러나온다.
“지금까지 고마웠네. 맛있게 먹게 브냐우닝…….”
“먹어? 누구를?”
“나, 잡아먹을 거 아닌가?”
“아니 내가 왜 너를 잡아먹는다고 생각한 거야…….”
“하지만 브냐우닝이, 사람이 닭을 키우는 건 닭을 먹기 위해서고 소를 키우는 건 소를 먹기 위해서랬으니까, 브냐우닝이 나를 키우는 이유는……으에에에에에에에에엥!”
“아니 이거 참…….”
그제야 방석 옆에 널부러진 동화책과, 오늘 아침 워켄이 나를 배웅하면서 했던 질문이 떠올랐다. ‘브랴우닝, 브랴우닝은 나를 키우는 건가?’ 부모라도 그리워진걸까 싶어 힘차게 대답해주었더랬다. ‘물론이지! 내가 네 주인이니까. 앞으로도 계속해서 기를 거야.’
그걸 그 뜻으로 해석하다니.
상황파악이 끝나자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내가 없는 동안 키운다는 의미를 곱씹어보면서 계속해서 책을 뒤적거렸을 작은 고양이의 모습이 절로 떠올랐다. 지금도 저렇게 울먹이면서, 제 딴에는 큰 결심을 하고 목을 내어놓는 거겠지. 나 참, 같이 살았으면 얼마나 같이 살았다고 그동안 즐거웠네. 라는 건지. 미처 벗지 않은 코트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핸드폰을 꺼내 었다.
“그런가. 나에게 먹혀주려고 이렇게 예쁘게 기다리고 있었구나 워켄.”
“먹을 거면 빨리 먹게. 어려서 먹을 건 없지만 그래도 맛있을 거라고 생각하네.”
“그럼 마지막 유언은? 죽기 전에 하는 말이야. 소중하게 간직하기 위해서 기록해놔야지.”
“브냐우닝… 내가 없어도 밥 굶지 말고, 그 이상한 연기 나오는 거 계속 갖고 놀지 말고, 우유는 꼭 따듯하게 데워서 마시고, 그리고, 그리고, 정말 좋아하네 브냐…후에에에에에에 브냐우닝! 브냐우니이이이이잉!”
“그럼 마지막으로 꼭 안아주기 할까?”
“응……!”
나중에 워켄이 어른냥이가 되면, 그 때 보여줘야지. 품 안에서 서럽게 우는 워켄을 보면서, 나는 조용히 버튼을 눌러 클라우드 서버에 동영상을 업로드했다.
꿈에서 워켄은 어린아이가 장난감을 가지고 놀듯이 잡동사니들을 그러모아 조금씩 분해해보고, 서로 맞대어보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렇게 부품들을 달그락거리다 보면 원래 하나였던 것처럼 꼭 들어맞는 것들이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전혀 다른 곳에 쓰이던 것이었지만, 무에서 유가 된 것이 다시 무로 돌아갔다가 유가 되는 광경에 워켄의 눈이 빛났다. 뒤에서 그것을 퍽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는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워켄은 뒤 한 번 돌아볼 줄을 몰랐다.
그러다가 문득 느껴지는 피 냄새에 뒤를 돌아보면, 붉게 젖어버린 땅 위에 우두커니 혼자 서있는 자신이 있었다. 급하게 의료용품을 찾아보려고 다시 책상을 바라보았지만, 어느새 책상과 병원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저 혼탁하게 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댄.”
배경은 빠르게 바뀌었다. 시체가 하나씩 둘씩 사라지고 그 주변을 많은 살아있는 사람들이 둘러쌌다. 질책하는 눈빛, 섞여들 수 없는 이질감.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 나온 자신. 제국 성벽에 기대어 앉아 그제야 막힌 울음을 터트렸다. 아무도 달래주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남이었다. 점점 주위가 새카맣게 잠겨들었다. 워켄은 계속해서 그리운 이름을 불러대었다.
“댄, 댄…… 미안해요…….”
“괜찮네, 워켄.”
눈물을 닦아주는 손길에 놀란 워켄의 눈이 뜨였다.
눈을 떠 보면 익숙한 가구들이 보였다. 내 방인가? 힐끗 주위를 둘러보니 인형의 여관은 맞았으나 그곳에 있는 물건들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옆에는 루비오나의 대공과 상점의 어콜라이트가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제야 워켄은 탐색을 나갔다가 쓰러져 돌아왔던 사실을 떠올렸다.
“악몽을 꾼 게로군.”
“로즈마리의 향을 더 강하게 피우는 게 좋을까요?”
“그건 닥터의 뜻에 따르는 게 좋겠지.”
“그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닥터. 좀 더 향을 맡으면 악몽은 잊을 수 있습니다.”
“아니, 괜찮네… 잊고 싶지 않아.”
“그렇습니까. 그럼 이만 향을 거두어가도록 하지요.”
루드가 창문을 열자 스산한 바람이 로즈마리 향기를 가지고 나갔다. 사실은 잊고 싶을 만큼 괴로웠지만, 이것은 잊어선 안 되는 거라고, 마음속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그는 자신일 수도 있고, 죽어버린 댄일 수도 있었다. 눈물젖은 뺨에 바람이 스치자 몸이 떨렸다. 곧, 그런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투박하고 따스한 손에, 워켄은 한 번 더 눈물을 흘렸다.
가볍게 양장본 표지가 덮이는 소리와 함께 그 목소리도 끝이 났다. 소파에 드러누워 있던 브라우닝은 한쪽 눈을 떠 가만히 옆을 바라보았다. 테이블 위에 쌓여있는 책이 일곱 권,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책들이 다섯 권. 방금 손에 들려있던 것이 떨어져 여섯 권. 비어버린 손이 테이블 위로 올라가자 테이블에 놓인 것도 여섯 권. 방에 걸려있는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도 여섯 시.
언제부터 그가 이렇게 동화책에 몰두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아서, 브라우닝은 입을 열었다.
“그만 읽게 워켄.”
그제야 줄곧 책으로 향해있던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다.
“워켄.”
“하지만 브라우닝, 다음 책을 읽어주지 않으면 아이들이 보챈단 말일세.”
“아이들 누구?”
“누구냐니… 그거야 당연히 도니타와 쉐리─”
“─는 이제 없잖나.”
“거짓말…….”
“거짓말이 아닐세. 현실을 보게 워켄. 도니타와 쉐리는 여기 없네.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아니야!”
거센 마찰음과 함께 입에서 비릿한 맛이 퍼지기 시작했다. 브라우닝은 돌아간 고개를 천천히 원래 위치로 돌려놓으며 슬쩍 혀를 굴렸다. 뺨의 아픔은 익숙했지만 이번처럼 혀까지 깨무는 경우는 드물었다. 하지만 뺨과 혀의 아픔보다도, 워켄의 행동 그 자체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눈물이 차올라서 흐릿해진 눈에도 그게 보이긴 한 것일까. 흠칫, 하고 흰 가운으로 감싼 어깨가 떨려왔다. 항상 이런 식이면서 왜 매번 같은 일을 반복하는 건지. 힘이 풀린 듯 털썩 주저앉아버린 워켄을 끌어안으면, 늘 그랬듯이 잇새로 새어나오는 울음소리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과 함께 감겨오곤 했다.
“아니야, 거짓말이야, 도니타는, 쉐리는 여기에 있네 브라우닝…….”
그러니까 그 둘은 없단 말이야.
언제 되찾을지 모를 자네의 기억을 위해서, 사라져-케이오시움이 되어-버렸잖나.
「그 아이들을, 꼭 그렇게 희생시켜야 했나?」
「도니타와 쉐리는, 분명 닥터가 살아 만든 인형 중에서 가장 걸작일 테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존재 자체를 없애버리는 건 너무하잖나! 분명 다른 방법을, 너는 알고 있었으면서!」
「말했잖아요. 그 아이들은 걸작이라고. 닥터의 지식과, 노력, 갈망, 무의식을 재구성한 결정체. 그러니까, 그 아이들의 머리카락 한 올 남기지 않고 만들어낸 케이오시움이어야 닥터에게 어울리는 것이 아닐까? 저는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에요.」
「너는 우리들의 기분 같은 건 모르는구나.」
「그런가요? 잘 모르겠습니다.」
할 말을 잃은 워켄을 대신해 브라우닝이 찾아갔던 날, 무뚝뚝하던 인형의 목소리가 그렇게 서늘하게 들린 적이 없었다. 조금 이상하긴 해도 언제나 작고 귀엽다고 생각하던 인형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은 워켄이 사용하던 침 따위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예리해서, 그리고 그걸 받아들일 만큼 워켄은 생각보다 강하지 못해서,
「여기 있잖아요. 이게……」
그 날카롭고 치명적인 한 마디─쉐리와 도니타에요─가 가슴에 박힌 워켄의 시간은 그날부터 움직이지 않게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렇기에 몇 번이고 일러줘도 알아듣지 못한다. 들으려 하지 않는다. 브라우닝은 워켄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가슴 깊이 그를 끌어안았다. 가슴이 축축해지는 감각 역시 이제는 익숙했다. 인형보다도 더 인형 같다 여겨지던 사내가 우는 모습도 이제 그렇게 놀랍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브라우닝도, 워켄도, 이미 지쳐있었다.
“이제 지칠 때도 되지 않았나 워켄.”
“다음 책은 백설공주가 좋겠구나.”
“그만 하게 워켄.”
“옛날 옛날에”
“괴로운가? 워켄?”
“…한 나라의 왕비님은 아이가 없어서”
“워켄, 제발.”
“…눈처럼 흰 피부와 흑단 같은 머릿결……”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그리고 피처럼 붉은 입술…… 아…?”
“그리고 이게, 내가 잘하는 일인지 솔직히 확신할 수 없네.”
탄환이 지나간 자리에서 흘러나오는 워켄의 피는, 동화책의 그것처럼 붉지는 않았다.
“아, 아파…아파, 아파 아파 아파……어째서, 브라우닝……?
“워켄.”
“브라우닝, 아파, 어째서… 나, …죽어…버리는…….”
“아니, 아닐세. 죽지 않아. 오히려 다시 살아났지.”
그래도,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겨우 한 번 쏘았을 뿐인데, 워켄의 시간은 멈춰버린 그 날로부터 단숨에 자신의 옆까지 다가온 것이다. 존재하지도 않는 오토마타 소녀들 대신에 지금 존재하고 있는 자신에게로. 왕자님의 키스 대신에 탐정이 당기는 방아쇠로 워켄은 눈을 뜨고 조금씩 현실로 돌아오고 있었다.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지금 옆에 누가 있는지 아는 것이야말로 살아있다는 증거니까 워켄.”
브라우닝이 워켄의 가슴께를 지그시 누를 때마다 왈칵, 워켄의 입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평소라면 아군의 체력을 회복하는 데 쓰였을 피인데, 지금은 그저 두 사람의 옷과 바닥을 더럽히는 것 외에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고 있었다. 워켄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상처를 헤집고 있는 브라우닝의 손을 잡으려 들자 브라우닝은 한 발 더, 워켄의 어깨에 방아쇠를 당겼다. 결국,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버린 워켄을 보며 브라우닝은 웃었다. 미안하네, 하지만 괜찮아. 다 자네를 위한 거야.
“싫어, 이대로는 내,가, 사라져…….”
“걱정하지 말게. 사라지지 않으니까. 쉐리와 도니타가 사라지지 않았다고 말했잖나. 그럼 자네도 사라지는 게 아니야.”
“…다음, 다음 책을 읽어주지 않으면…….”
피가 맺혀 갈라진 목소리가 다시 책장 위를 맴돌고 있었다. 세 번째 탄환은 손등을 맞췄다. 이것으로 더는 동화책을 들고 읽을 수 없을 터였다. 워켄이 다시 망상 속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기 위한 네 번째, 다섯 번째 총성이 들릴 때마다 삽화의 눈밭은 동화 속 왕비님의 피 대신에 워켄의 피로 물들어갔다.
괴로워 보이지만, 이것이 최선이라고 여기고 싶었다. 일찍이 들어본 적 없는 비명이 질러질 때마다 계속해서 워켄과 자신에게 되뇌었다. 아픈 게 아니네, 죽는 것도 아니야. 피와 함께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주면서 브라우닝은 속삭이고 또 속삭였다.그러니 좀 더 나를 봐주게.
“…브라우닝…….”
“자네 소원은 내가 들어줄 테니까.”
마지막 한 발을 쏘았을 때, 워켄은 브라우닝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욕심부려도 괜찮지 않겠나.”
완전히 빛을 잃은 눈을 바라보면서, 브라우닝은 차갑게 식은 입술에 자신의 입을 포개었다.
“……이제 편히 쉬게, 워켄.”
“닥터는 어디에 있어요?”
“여기 있잖나.”
“나는 닥터를 그렇게 만든 기억이 없는데요.”
“내가 그렇게 했네.”
인형의 눈은 브라우닝의 손에 가 있었다. 말갛게 빛나는 흰 조각은 원래 브라우닝이 가지고 있을 물건이 아니었다. 하지만 인형은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되물을 뿐이었다.
“왜 그랬어요?”
“워켄이 원하던 일일세.”
“이해가 안 돼요.”
“이걸로, 이제 워켄은 아프지도, 괴로워하지도 않으니까. 죄책감도 느끼지 않아.”
“닥터가 원하던 건 쉐리와 도니타와 함께 사는 거라고 했잖아요.”
“그렇게 잘 알면서 잘도 그 소원을 박살 내놨군.”
브라우닝은 워켄-케이오시움-을 손수건으로 싸 코트 안주머니에 집어넣고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후─ 하고 입에서 내뿜는 연기가 흩어지는 방에는 더는 워켄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오묘한 색으로 젖어버린 동화책 한 권이 아무렇게나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인형은 그것을 주워 페이지를 팔락팔락 넘기기 시작했다. 대답하지 않는 탐정 대신에 그 책이 자신의 궁금증을 풀어 줄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마지막 기억을 찾을 때에는 케이오시움 세 개가 필요하다고 했지?”
“네.”
“도니타와 쉐리, 그리고 워켄으로 만든 케이오시움은 내게 써주게.”
“어째서?”
“그게 워켄의 소원이라고 했잖나. 그 날이 되면, 워켄은 내 안에서, 쉐리와, 도니타와, 그리고 나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래, 그거야.”
“역시 잘 모르겠어요.”
“딱히 기대하지도 않았어.”
얼룩지지 않은 마지막 페이지의 한 구절. 인형도, 브라우닝도 한동안 그 문장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카렌베르크는 이불을 박차고 침대 위에 정자세로 무릎을 꿇고 앉았다. 하마터면 ‘신이시여’라는,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를 입에 올릴뻔한 것을 억누르고 취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뒤이어 만만치 않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생각났는데 다행히 그 단어는 카렌베르크의 머릿속에서 다의어로 취급되는 명사로 바뀌어 나왔다.
“닥터?”
=신이시여 여기 천사가 있어요. 대략 저런 의미로 해석되는 말을 내뱉은 후에 카렌은 천천히 고개를 양옆으로 돌려가며 자신의 침대에 누워있는 불청객을 살펴보았다. 언제나 창백하게 흰빛을 띈 피부와 밤의 공기처럼 내려앉은 속눈썹, 머리카락, 늘 입고 있는 익숙한 가운. 틀림없이 자신의 연인인 워켄이 맞았다. 잠이 덜 깨어서 헛것을 보나 싶어 뺨을 꼬집어 본 뒤에도 워켄의 모습이 사라지지 않자 카렌베르크는 다시 얌전히 누워 워켄을 끌어안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는데 걸리적거리는 무언가’취급을 하며 짜증을 냈지만 정체를 안 이상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이었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이쪽으로 와서 잠들 정도면 많이 피곤했나 보다. 라고 생각하며 카렌베르크는 워켄의 목에 매여진 크라바트를 끌러주었다. 한결 편해진 숨소리가 기분 좋게 귀에 감겨왔다. 퀘스트와 듀얼, 아니면 취미인 인형제작이나 코덱스 연구. 무엇 때문에 각자의 방도 못 알아볼 정도로 지쳤던 걸까 하는 궁금증이 일긴 했지만 그래도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무의식적으로 이곳이 돌아가야 할, 가장 편안한 곳이라고 여기고 있었던 거라면 언제든지 수면을 방해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도 정말 의외의 모습을 많이 가지고 있다니까. 상대가 사람이든 악마든 인형이든 놀라게 하는 데에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
카렌베르크가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웃었지만 워켄은 대답 대신 카렌의 옷깃을 붙잡을 뿐이었다. 높지는 않지만 이불에 감싸여 적당히 따듯해진 체온이 전해져 새벽 공기마저 훈훈하게 바꿔놓았다. 부드럽게 흩어진 머리카락을 손에 감아보던 카렌베르크는 이번에는 이쪽에서 응석을 부릴 심산인지 워켄의 품속에 얼굴을 묻고 부비적거렸다.
아무래도 피로의 원인은 늦은 탐색 때문인 것 같았다. 맨 처음 카렌의 후각을 자극하는 것은 옅은 히스 향기와 담배 냄새. 바인더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전사들은 한정되어 있으므로, 함께 떠났던 멤버는 탐정이나 총잡이, 혹은 둘 다였던 듯싶었다. 닥터는 담배연기 싫어하는데. 망할 것들. 속으로 짧은 욕지기를 내뱉으며 카렌베르크는 더 깊이 코를 묻었다. 집요하게 천을 뚫어버릴 기세로 숨을 들이쉬자 그제야 미약하게 워켄의 살 내음이 맡아졌다. 그 자체로 너무 약해서 금방 주변의 냄새에 묻혀버리는 체취였지만, 그래도 언제나 변함없이 마음을 진정시켜주는 그 희미한 향에 카렌베르크는 다시 눈을 감았다. 작게 오르내리는 가슴에 맞춰 들려오는 숨소리가 조용한 자장가처럼 느껴졌다.